손동유 마을아카이빙

저는 ‘기록관리’라는 분야에서 공부하고 일하고 있습니다. ‘기록관리’는 99년에 우리나라 ‘기록관리법’이 생기면서 자리 잡은 신생 분야입니다. 하다 보니 저는 주로 공적인 영역보다는 민간영역, 방법으로는 그리고 구술 기록에 관심을 둬서 그 일을 주로 하고 있어요. 작년에 협동조합 형태로 작은 연구소를 만들었습니다. 협동조합 이름은 ‘아카이빙 네트워크 연구원’입니다. ‘기록으로 연대하고 싶다.’ 는 뜻입니다. 여러분들이 마을을 근거로 여러 활동을 하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만난 분들과 인터뷰를 통해 나눈 이야기를 기록으로 잘 남기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하고 싶어요. 그에 앞서 ‘기록’에 대해서 이야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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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을 잘하던 나라, 조선

우리나라의 경우 ‘기록’을 잘하던 나라인데 ‘단절’이 있었어요. 유네스코에서 세계기록유산이라고 해서 세계적으로 의미 있는 기록들을 지정하는데요. 우리나라는 11개의 세계 기록물이 기재되어 있어요. 대부분이 조선 시대 것이고, 현대 기록물은 2개가 있어요. 하나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록물이고 하나는 새마을운동 기록물입니다. 새마을 운동 기록이 등재된 데에는 다소 정치적인 배경이 있는 거 같습니다. 5.18운동 기록물을 등록할 때에는 반대했던 그룹도 있대요. 여러 이유를 들어서요. 그래도 5.18운동 기록물이 등재되고 나서 바로 다음다음 해에 새마을 운동 기록물도 등재했다고 합니다. 현대 기록물은 그렇고요. 나머지 9개는 조선 시대 기록물인데. 대표적인 게 조선왕조실록이죠.

『조선왕조실록』은 중요한 기록입니다. 500년 가까이 존속한 왕조의 역사를 단일한 서술 체제로 썼다는 것도 중요하고요. 당대의 왕은 그걸 열어보지 못하게 해서 객관성을 유지한 것도 중요하죠. 그리고 보존성이 좋은 한지에 써서 여러 곳에 분산 보존을 해서 숱한 전란을 겪은 현재까지도 남아있을 수 있었죠.

그것은 갑자기 만들자 해서 된 것은 아니고 조선시대 자체가 기록문화를 꽃 피웠던 시대라고 할 수 있어요. 조선 시대의 국가법에는 약 20% 이상의 조항이 기록을 어떻게 만들고, 관리하고, 나중에 찾아볼 것인가에 대한 규정으로 짜여있었다는 거죠. 그 시대에 세계적으로 그런 정도의 기록에 대한 중요성을 국가적으로 갖고 있던 나라는 그리 많지 않아요. 그런 토양에서 『조선왕조실록』이 나오게 된 거죠.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 조선 태조부터 철종까지 25대 472년 간(1392~1863)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책이다. 총 1,893권 888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왕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열람할 수 없었고, 국왕 사후에 편찬함으로써 진실성과 신빙성을 확보하였다. (출처 : 국세기록문화전시회)

 

조선 후기의 사회 변화

조선 후기(1800년대 말)로 가면서 조선 사회는 여러 가지 내적 성장을 거칩니다. 농업이 발달하면서 생산력이 늘어나죠. 농장이 생기고, 부자 농부들도 생기죠. 요즘으로 하면 회사 형태의 대농장을 경영하게 되죠. 이렇게 대자본이 형성되면서 자본주의 초기 단계로 스스로 진입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족보를 살 수 있게 되었고, 그를 통해 자생적으로 신분제도가 무너지게 되었죠.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회로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대표적으로 이 사례를 드는 거지 그 외에도 조선 사회는 경제구조, 신분제, 사상인식 등 괸장히 큰 변화를 겪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여러 민란들, 특히 동학농민전쟁으로 상징되는 1800년대 후반 민중의 성장은 과거에는 볼 수 없었던 거죠. 그런데 조선시대 조정은 외국의 힘(청, 일본)의 힘을 빌려 민중을 진압하는 안타까운 상황이 벌이죠. 이 때에 서구 여러 나라에서는 제국주의의 움직임을 시작합니다. 자신들의 경제적 새로운 대상을 찾아서 동양으로 눈을 돌리게 되죠. 그러면서 일본, 중국, 우리나라 등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합니다.

일제강점기, 기록의 단절

잘 생각해보면 그 당시가 우리로서는 굉장한 기회였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부적으로, 내부의 힘으로 한 사회가 변하는 아주 중요한 시기였는데요. 아무래도 내적 동인보다는 외적인 힘이 힘의 관계에서 더 셌다고 봐요. 그래서 결국에는 우리가 스스로 나라를 바꿔내지 못하고 외세에 종속되는 그런 과정을 겪을 수밖에 없었는데요. 그래서 우리나라는 내적, 외적 어려움을 조선 후기에 거치면서 역동적으로 변화해 왔어요. 유독 일본은 우리를 완전히 복속시킬 준비를 해서 1910년에 완전히 자기들의 식민지로 만들어버리죠. 일본이 우리나라를 식민지화 한 것은 다른 서구가 경제적 식민지를 찾은 것이라든지, 일본이 대만, 필리핀 등의 식민지 정책을 펼친 것과는 굉장히 달라요. 그들 표현으로는 ‘동화정책’이라고 하죠. 아시겠지만 말과 글도, 역사도 다 자기네 것으로 흡수시키려고 했죠. 그런 이유에서 ‘너네 역사는 열등해, 너넨 가진 게 없어, 우리가 와서 이런저런 거 다 해주는 거야’ 같은 입장을 계속 피력했고, 결국 이름도, 글도, 말도 다 뺏어 가는 정책 구사했죠. 그랬기 때문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록유산, 문화유산은 그들이 볼 때 그들의 입장에서 열등감만 생기는 거죠. 그래서 자기들이 식민 지배를 하기 좋거나 필요한 기록은 남기고, 그렇지 않은 건 버리고, 값나가는 문화유산은 훔쳐간 거죠. 일제강점기 기록에 대한 정책은 딱 그렇게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광복 이후

기록 단절의 시작은 일제강점기이었다고 보면 되고요. 광복과 한국전쟁과 분단을 거치는 동안 이전에 했던 기록 문화나 제도를 복원하고 복구할 틈이 없었어요. 그러다 결국은 전쟁 이후에 휴전선이 그어지고 남과 북이 갈리게 되면서 체제 경쟁에 돌입하면서는 더더욱 어려워졌죠. 남한만 이야기해도 이승만, 박정희 독재정권이 이어지는 과정에서 기록을 남긴다는 것은 최소한의 범위에서만 이뤄졌어요. 부도덕한 정권에서는 기록이 안 남았으면 좋겠고, 누가 안 봤으면 좋겠는 거예요. 국가라는 거대한 조직을 운영하는 가운데 기록이 없을 수는 없어요. 중요하고 필수적인 기록은 만들어서 갖고는 있는데 그 또한 누가 보지 않았으면 좋겠는 거고, 만들었어도 빨리 없애버리는 거죠. 그래서 기록 관리가 제대로 되지를 않았어요. 그러다 1999년 ‘기록관리법’이 생기면서 우리도 다시금 기록을 잘 관리하자는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왜 그럼 1999년이냐. 그 시기가 ‘국민의 정부’(김대중 취임 이후)거든요. 1987년에 이른바 직선제. 그 전까지는 대통령을 국민의 손으로 뽑지 못했잖아요. 87년 ‘6월 항쟁’을 거치면서 직선제를 포함한 여러 민주적 개헌이라는 성과를 얻어냈죠. 그 이후에 사람들이 생각을 하는 거예요. 우리가 모두 힘을 합쳐서 외치니까 5.18이라는 시민을 수천 명이나 사살하고도 대통령이 됐던, 움직일 수 없는 권력자인 전두환, 노태우도 뒤로 물러나는 구나. 이긴다는 것은 이런 거구나. 그런데 직선제만 얻는다고 좋아지나 그 다음에는 어디로 가야하지? 그렇다면 민주주의는 뭐지? 눈앞의 미래에 대해 설계를 하려고 고민을 하다 보니 앞을 보려면 과거를 봐야 하잖아요.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나. 우리 사회의 과거 기록을 그래서 살펴보니까 뭐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연구자들 중심으로 외국에 나가서 우리 자료를 외국에서 들여오기 시작한 거예요.

일제도 패망하면서 정리 안 된 문서를 다 가져갔고요. 미국도 한국 전쟁 이후에 우리 자료를 다 가져갔어요. 우리 자료가 그들 나라에 있는 거죠. 또 중국. 러시아(당시 소련)도 있죠. 다른 나라 가서 사와야 하고 복사해 오고. 한심하잖아요. 우리가 왜 못 갖고 있나 했나 하면 방금 말씀드린 상황이었던 거예요.

이제라도 우리 기록을 잘 만들고, 관리하자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기 시작했어요. 그것이 1990년대를 지나면서 법제화하기 시작했죠. 사람도 필요하고, 제도도 필요하고, 환경도 필요한 일이다 보니 시간이 좀 걸렸어요. 다행히 그 다음 대통령으로 선출된 노무현 대통령은 특별히 기록에 대한 관심도 많은 분이었어요. 그 당시에 기록 관리 문화가 급속히 발생했어요. 단적인 예로 김대중 재임 시절에 기록관리법을 만들고 잘하기 했는데, 대통령 관련 기록이 20만 건이에요. 이승만, 김영삼 대통령까지 50년 간 대통령들이 남긴 걸 다 합쳐봐야 10만 건이다. 역대 대통령 시절 남긴 거 보다 두 배를 김대중 재임 시절에 남겼는데. 하지만 기록 관리 입장에서 김대중 재임 시기에 기록을 더 잘 남겼어야 한다는 애정 어린 비판을 했어요. 더 잘했어야 한다는 비판이죠. 그런데 노무현 재임 시기 기록물은 800만 건이 넘어요. 질이 다른 거죠. 물론 그 안에 500만 건은 전자 기록이에요. 그렇긴 하지만 그 이외에도 300만 건 이상을 남겼다는 것은 김대중의 15배라는 거죠. 얼마나 꼼꼼히 남겼나 볼 수 있는 거죠.

국가 제도는 한 번 만들어 놓으면 갑자기 퇴행하기 힘들어요. 그 이후에 이명박 재임 시절 기록도 엇비슷한 숫자로 남았다고는 해요. 다만 그 질은 한 번 봐야 해요. 의문은 하나 있는데 기록을 어떻게 생산하고 있는지 생산현황통보라는 표현을 쓰는데요. 공공기관은 시민들이 요청하거나, 요청하지 않아도 생산현황통보를 공지를 해야 해요. 그런데 이명박 정권에서 그걸 안 했어요. 정보공개센터에서 청구를 했는데 20만 건을 남겼다고 해요. 그리고 나서 임기 말에 900만 건을 이관을 한 거예요. 1년에 880만 건을 어떻게 만들어요. 급조한 건지, 어디 있다가 온 건지 알 수 없는 거죠. 노무현 대통령 기록 정리에도 4~5년은 걸렸어요. 이명박 정권 기록도 지금 파악하고 있어서 한 3~4년 정도 지나야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겠죠.

이렇게 비약적으로 99년 이후 10여 년 간 기록관리 제도나 문화가 급격히 자리 잡기 시작했어요. 모든 공공기관은 기록을 의무적으로 관리하게 되어 있죠. 생산, 관리, 활용 등의 체계가 다 법으로 정해져 있어요. 공공기관은 어느 정도 자리 잡았다고 볼 수 있어요. 그렇게 자리 잡힐 수 있던 이유는 과거의 문화와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죠. 그게 아니었다면 이질적인 법이 한 사회에 그렇게 빨리 자리 잡기는 어려운 거죠. 우리는 이런 환경에서 기록을 대하고 있다는 전제가 필요합니다.

 

‘기록’의 여러 이름
 : Archive(아카이브), Record(레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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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을 표현하는 외래어들이 있어요. 아쉽게도 외래어를 그냥 쓰고 있는데요. Archive(아카이브), Record(레코드)라는 표현을 주로 사용합니다. ‘archive'(아카이브)는 인터넷이 활성화되면서 온라인 환경에서 새롭게 등장한 용어 같아요. 자료가 많이 축적되어 있는 공간, 특히 사이버 공간에서 많이 쓰는데요. 원칙적으로 말하면 두 가지 뜻이 있어요. 하나는 영구적으로 보존할 가치가 있는 기록을 ‘archive’라고 해요. 또 하나는 영구적 기록을 다루는 기관도 ‘archive’라고 하죠. 우리나라의 중앙기록물 관리기관은 ‘국가기록원’인데 ‘national archive’라고 하거든요.

그에 비해서 ‘Record(레코드)’는 일상적으로 만들어지는 업무상의 기록들이에요. 행정문서, 결제 서류, 도면, 카드 대장 등 여러 가지가 있잖아요. 그런 걸 Record(레코드)라고 합니다. Record(레코드)는 무조건 다 남기는 게 아니라 보존 연한 동안만 관리하고, 절차에 따라 폐기합니다. 거기서 남는 것을 영구적으로 보존하는 겁니다. ‘archive’는 여러 가지 영역이 있어요. 문서, 사진, 동영상, 포스터, 기념품, 언론 자료 등등 여러 가지 기록들이 있는데요. 저것 중에 영구적으로 남기기로 한 것이 ‘archive’에요.

그럼 영구적으로 남기기로 하는 기준과 잣대는 무엇이냐? ‘역사적 가치’, ‘법적 가치’, ‘행정적 가치’ 세 가지 기준이 있어요. 먼저 ‘역사적 가치’는 이 기록이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지. 이거는 역사적 가치가 있어서 남겨 놓으면 나 혹은 우리의 흔적이나 기록, 발자취를 설명하는 데 꼭 필요하다고 하면 남기는 거죠. ‘법적 가치’는 살다보면 개인이나 집단은 뜻하지 않게 쟁송에 휘말릴 수가 있어요. 그랬을 때 이 기록이 가치가 있겠느냐. 또 ‘행정적 가치’는 일을 하는데 도움이 되겠냐는 거죠. 시행착오를 줄이는데 도움이 되겠냐. 이걸 남기면 업무자가 바뀌었을 때 이 자료를 보고 도움을 받을만한 자료냐. 이런 판단으로 여기 해당되는 건 남기는 거예요. 아닌 건 버리는 거고요.

공공기관은 영구 보존의 기준이 텍스트로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민간 영역에서는 저걸 글로서 명시할 수 없으니까 주관적 판단도 들어가겠고요. 예를 들면 편의점에서 물건 사면 영수증 받는데 필요 없으니까 ‘버려주세요’하잖아요. 그런 영수증이나 계약서 같은 것을 예를 들어 볼 수가 있는데요. 하숙방, 자취방 등등 들어갈 때 원래 계약서를 써야 해요. 1년에 보증금 100만원에 월세 20만원 내기로 하고 썼어요. 1년 살다가 나왔어요. 100만원 돌려받았어요. 그러면 그 계약서는 이제 필요 없죠. 그런데 내가 돈을 못 냈다거나, 보증금을 안 돌려 주면, 그 계약서가 중요하게 되죠. 그래서 계약서는 ‘법적 가치’는 그 방에서 사는 동안은 중요하죠. 나와서 이런 집에서 내가 살았다는 걸로 좋은 자료라고 생각하면 갖고 있는 거고 필요 없다고 생각하면 버리면 되는 거고요. 그때 ‘역사적 가치’를 평가하는 거죠. 공적인 기구에서도 가치판단에 대해서는 몇 가지 잣대로 종합 판단을 하게 된다는 말씀이고요.

기록 관리의 단계
 : 획득-관리-활용

33거칠게 기록을 관리하는 세 개의 단계를 말하면요. 첫 번째는 기록이 만들어지는 과정(획득)이에요. 기록을 보존하고 관리하는 입장에서는 어디서 얻어오는 것도 중요하죠. 기증 받기도 하고 수집하기도 하죠. 이 과정만 하더라도 복잡해요. 한 사람에게 기증을 받을 때도 ‘어떻게 접촉하느냐’, ‘과정에서 어떤 협상을 하느냐’, ‘근거 문서는 뭘 남기냐?’ 등등 굉장히 유형별로 다양한 활동이 이루어져요. 그렇게 기록을 획득하는 게 첫 번째죠.

두 번째 단계는 ‘관리’를 하는 단계에요. 의미가 있고 중요해서 확보한 거고, 오랫동안 갖고 있으려고 하면 여러 가지 활동이 있어야죠. 기록이 오래 가게 하는 물리적 조치도 있어야 하고, 나중에 찾아보기 쉽게 하는 편의적 조치도 있어야 하는 거죠. 이런 걸 ‘관리적 활동’이라고 해요. ‘정리’ 정리는 필요해요. 근데 정리 방법은 참 어려워요. 어떤 사람은 책상 위에 자기 소지품을 잘 정리해서 가위가 어디 있는지 바로 찾을 수 있는 사람이 있고. 근데 어떤 사람은 책상이 막 어지러워요. 그런데도 그 사람은 자기 책상에서 물건을 바로바로 찾아요. 자기만의 질서가 있는 거죠. 그래서 저는 예전에 이건 정리 잘 된, 안 된 책상이라고 은연중에 구분했는데, 이제는 자기 식대로의 방법이 있다고 생각을 해요. 하지만 여러 사람이 쓰는 책상이라면 약속을 해야 할 거예요. 자기만 알고 넣어 놓으면 그건 정리는 아니죠. 약속과 질서만 있으면 돼요. 정리하는 사람 혼자가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럿이 약속하는 것이 좋아요. 그래서 제가 예를 드는 게 ‘파일명’이에요. ’파일명’ 정할 때 앞에는 날짜 쓰기. “150921_키워드_작성자”로요. 그러면 찾아보지 않아도 대략 이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기 쉽고요. 그리고 남한테 유통을 해도 헷갈리지 않아요. 이런 사소한 것들을 포함해서 정리와 관리에 대한 아주 초보적인 원칙들은 공유하면 좋겠다 싶고요. 그런 단계를 관리, 정리라고 봐요.

그 다음은 여러 사람과 이제 나눠보는 ‘활용’ 단계입니다. 활용 방법은 무궁무진해요. 책도 있고, 도록을 만들 수도 있고, 인터넷 공간에 홈페이지를 만들 수도 있고, 전시할 수도 있죠. 너무 많아서 어떻게 얘기할 수 없을 정도고요. 그리고 갖고 있는 기록물을 원 상태 그대로 오픈을 할 수도, 가공해서 오픈 할 수도 있고요. 다만 여기서 말하고 싶은 거는 기록을 만들고 관리하는 단계가 이렇게 세 단계가 있는 데, 우리는 만들고 관리하는 단계를 자꾸 잊고, 예쁘게 보여주는 것에 의욕이 더 앞서 있다는 거 같아요. 그래서 잘 만들고 관리하는 것을 소홀히 하는 거 같아요. 그러면 한두 번은 예쁠 수 있는데 찾기도 힘들고, 이후에 더 나은 성과를 내기는 어려워요. 그래서 이렇게 아주 기초적인 기반만 만들어 놓으면, 나중에 좋은 콘텐츠들을 유통할 수 있고요. 기록을 만들고 관리하는 일이 눈에 안 띄고 힘든 일이지만 잘 닦아 놓으면 일의 기반이 되는 일이에요.

기억과 기록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은 손에 잡히고 눈에 보이는 물리적 기록을 이야기했어요. 그런데 그들만 가지고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죠. 문서 기록만 가지고는 다 알 수 없는 풍부한 삶의 관계들이 있어요. 우리의 역사는 관공서의 문서 기록만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죠. 누구나 살아온 경험과 기록을 ‘말을 통해서’ 남겼을 때 훨씬 풍부하게 남길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기록만큼 기억도 중요하다. 이것은 마치 맞물리는 톱니바퀴처럼 함께 맞물려야 역사라는 수레바퀴가 온전히 굴러갈 수 있다는 겁니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보면 화도 나는데 신기하기도 해요. 한 집안에서도 한 상황을 겪고 입장이 다 다른데. 가족끼리도, 그렇잖아요? 똑같은 현상을 보더라도 입장이 다 다르잖아요. 그런데 하물며 나라의 역사를 한 권의 책에 써서, “다 이렇게 생각합시다. 이게 맞습니다.” 이런 생각을. 그런데 그럴 법도 한 게요. 우리가 살아온 것을 생각해보세요. 여러분 살아온 학교가 다 다를 텐데요. 자기 출신 학교 홈페이지 가서 학교 연혁, 걸어온 길을 보세요. 보시면 다 ‘교장이 누구고, 1대 교장, 2대 총장, 이사장, 설립 허가 언제 받았고, 학과 어떻게 변했고, 부지 어떻게 늘렸고’에 대한 거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학교 친구들 만나서 술 한 잔 할 때 이런 얘기를 합니까? 학교 앞에서 불량 식품 사먹던 얘기, 나쁜 새끼 얘기, 굉장히 보고 싶은 친구 얘기, 무서웠던 선생님 얘기하죠. 학교 역사에는 이런 거 없어요. 우리에게는 역사인데. 그런데 우리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살아왔어요. ‘기관의 역사는 으레 저런 거야. 우리들의 역사 없이도 되나 보지.’ 이러고 살아왔기 때문에 역사 교과서 국정화 시도도 그들 생각에는 아마 가능할 것도 같아요.

같은 시대를 살면서도 정말 세상과 사람을 다르게 보고 살고 있는 거고. 그래도 저는 희망적인 게, 과거의 어른들은 이런 생각을 잘 안 하고 지내왔잖아요? ‘그런가 보다.’ 하고요. 그런데 우리는 이런 생각 꿈틀꿈틀하잖아요? 그래서 진짜 우리가 살아가는 이야기와 이 집단의 이야기, 역사를 제대로 쓰려면 공공기관의 공공문서로는 안 된다는 거죠. 우리의 삶의 이야기를 함께 기록해야 한다는 거죠. ‘역사교과서 국정화 하지 마라.’가 아니라, ‘우리들의 이야기도 있다. 우리들의 이야기도 넣어라.’라고 말할 수 있으면 더 좋겠죠.

 

마을 기록

요즘 ‘마을’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요. 어제 어떤 분이 페이스북에다 그런 글을 올린 걸 봤어요. ‘나는 마을이라는 개념을 거스르고 사나 보다.’ 단체를 하나 운영하다가 이웃집과 갈등을 겪으니 너무 피곤하다는 거예요. ‘진짜 마을이라면 긴 시간 이야기도 하고 관계도 복원하고 그래야 하는데, 그런 거 하기가 너무 힘들고 의미도 못 느낀다. 나는 나대로 잘 갈란다. 그러니 나는 마을에 거스르는 사람 아니냐.’하면서 스스로 힘들어하며 자조하는 글이었어요. 저는 그 사람이 살면서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봐요. 그런데 그분이 혹시 마을을 조금 오해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은 들었어요. 요즘 여기저기서 마을과 공동체를 많이 이야기하는데요. 그러니 마을은 너무나 정답이고 아름답고, 최선의 선택이라고 착각하지 않나 싶어요. 그러면, 가정은 항상 평화롭습니까? 온화한 표정으로 맞아주는 어머니가 계셔야 하고 근엄한 아버지가 책 보고 계셔야 하는 게 가정입니까? 적어도 제가 경험한 가정은 웃음과 욕설이 반반 정도 있고. 어렸을 때는 약간의 매도 있고. 고민도 있고 다툼도 있고 이런 속에서 기쁨도 행복도 있고. 그랬던 거 같아요. 마을도 과연 싸움 없고, 갈등 없는 마을이 있을까? 기쁨과 협력과 미래와 희망, 이런 키워드 안에는 갈등과 싸움과 다른 입장이 늘 내재하는 거죠. 그거를 드러내고 살자는 거죠. 드러내고 살면서 싸움이나 갈등은 조금씩 줄여나가고 관심과 협력을 늘려나가는 거죠.

하지만 우리 전 세대는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삶을 생각하기 어려웠다는 거죠. 우리 어른들은 경제 전쟁에 내몰려야 했고, 일단 먹고 사는 게 최선의 가치로 강요받았고, 애들은 공부 많이 해서 좋은 대학 가고 성공해야 가치 있는 삶인 것처럼. 그런 미디어와 대화 속에서 살았으니까. 우리는 마을의 삶에 대해서 꿈도 못 꿨고 옆집에 간섭하는 것은 주제넘은 것이라고 여겨졌고. 경험적으로 그게 삶인가요? 지쳐서 집에 돌아와 잠자고. 주말에도 잠자고. 옆집에서 사람이 죽어서 며칠씩 혼자 있고 우유와 신문은 쌓여가는데 문 한 번 두드려 볼 생각 않고. 그런 자각이 있었던 거죠. 그것이 마을이라는 새로운 상징어, 공동체라는 개념어로 우리 옆에 와 있다고 생각합니다.

구술 기록

그랬을 때 저는 구술, 말을 통해서 기록을 남기는 게 참 중요하다고 생각을 해요. 어떤 사람이 자기 삶을 자서전이든 회고록이든 쓴다고 했을 때 그걸 쓸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아요. 부모님을 생각해 보세요. 우선 시간도 있어야 하고요, 돈도 있어야 하고, 글도 익숙해야 쓸 수 있어요. 예를 들면 우리 동네 세탁소 사장님이 계신데 그 분이 생업을 포기하고 내가 살아온 바를 글로 쓴다? 쉽지 않죠. 회사 다니는 사람이 ‘나 자서전 좀 쓰고 올게요’ 그러면 아예 가라 그러죠. 하지만 말로만 남기는 건, 그건 가능하다는 거예요.

구술 방법론은 서구에서 먼저 시작을 했고요. 고대 사회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전쟁을 치르고 온 생존 병사들에게 전쟁에 대해 묻고 기록을 남기기 시작한 걸 시초로 잡아요. 가깝게는 프랑스혁명 이후에 유럽사회, 특히 영국에서 피지배계층들. 돈 없고, 배우지 못했고, 권력과 먼 사람들이 분명 그 사회에서 일익을 담당하며 사는데, 이 사람들의 흔적은 시간이 지나면 없어지는 거예요. 마치 그 사회는 명망가, 자본가, 권력가들이 만들어 놓은 것처럼 되어버리는 거죠. 이런 왜곡이 어디 있어요. 그래서 역사학자들 중심으로 이른바 ‘Subaltern(서발턴)’이라는 피지배계급의 목소리를 남기는 움직임이 생겼어요. 그리고 그렇게 해보니까 꽤 교훈점이 많은 거예요.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는 1980년대에요. 민주화운동이 한창 고양되었을 때 양심수에 대한 구술사를 시작하며 본격적으로 시작되죠. 비전향장기수, 양심수, 여성운동가들을 대상으로 구술사 방법을 적용한 현대사 연구들이 많이 진행이 됐어요. 주로 역사학이나 문화인류학 분야의 연구자들이 시작을 했어요.

그런데 빨리 활성화되지 못했던 건, 구술사 연구라는 게 품이 많이 들기 때문이에요. 자기가 자기 인생을 바쳐서 해야 할 가치 있는 연구다 할 때는 하지만, 계속 그걸 하기는 어려운 거죠. 연구자 중심의 저런 구술 연구가 참 의미 있게 진행됐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확산은 안 되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 현대사 자료가 너무 없다보니까 공공기관에서도 아직 생존한 원로 분들의 목소리를 남기려는 이른바 구술사업을 시작했어요. 조금씩 조금씩 활성화된 측면이 있습니다.

구술기록의 특징

구술기록의 특징을 말씀드리면 구술성, 주관성, 서사성입니다. ‘구술성’이라는 건 똑같은 말을 해도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르죠. 같은 내용을 전달했다고 해도 다 다른 거예요. 같이 소풍을 다녀와도 얘기가 다 다른 거예요. 사람마다 사고구조와 표현방식이 다른 거예요. 구술자마다의 유일한 특성이 있다는 거고요.

이거와 연관되지만 조금 다른 각도에서 ‘주관성’이라는 특성이 있어요. 구술 자료가 객관적이냐는 질문을 저도 계속 받는데요. 그런데 그거는 우문이에요. 어리석인 질문이에요. 객관적인 사람이 있어요? 객관적이려고 하는 사람은 있죠. 그렇지만 절대 객관인 사람은 없죠. 거짓말 한 번도 안 해본 사람 있어요? 사람이 항상 참, 진실만을 말할 수는 없어요. 착각 때문이라도 잘못 말하는 경우가 있는 거죠.

그것보다는 ‘그 사람이 왜 이렇게 말했는가’ 하는 ‘맥락’을 확보하는 게 중요해요. 설령 거짓말을 했다 해도 ‘왜 그런 거짓말을 했나’, ‘착각이라면 왜 그런 착각을 했나’ 그걸 재료 삼아 분석도 하고 연구도 해야 하는 거죠. 기록 관리처럼 구술도 만드는 과정, 관리하는 과정, 활용하는 과정이 있는 거예요. 우리가 활용 환경에 익숙하다보니까 인터뷰를 하면서 계속 ‘이걸 어떻게 나중에 서비스할 건가’에만 집중하거나 그 과정 자체가 완결되는 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요. 인터뷰하는 과정은 만들고 있는 중이에요. 그걸로 완결이 아니죠. 다만 좋은 자료를 만들기 위해서 꼼꼼하게 물어보고, 어색한 건 확인도 하고, 만나기 전에 준비도 해야죠. 필요하다면 원본에 가장 비슷하게 다가갈 수 있게 기술(영상 등)을 사용할 수도 있고요. 나중에 어떻게 쓰는지는 필요에 따라 만들면 되는 거죠.

그 다음에 ‘서사성’은 사람은 똑같은 경험을 했다 하더라도 자신이 믿고 있는 바에 따라서 해석한다는 거예요. 요즘도 시위가 많이 있죠. 만약에 광화문에서 시위가 벌어진다면, 시위 참가자가 있을 거고, 그 안에 방식에 대한 의견이 조금 다를 수 있어요. 무조건 평화적이어야 해, 그래도 경찰이 강경 진압하면 맞서야 해. 조금 다를 거예요. 경찰 안에서도 생각이 다 다를 거고요. 또 그걸 지켜보는 샐러리맨도 있고, 차 막혀서 불만인 사람도 있고요. 그 현장에서도 어떤 위치에서 그걸 겪었나에 따라 다 다르게 말한다는 거예요. ‘아우, 그날 내가 시위 때문에 늦었어. 아우, 시위대’ 그럴 수 있는 거고. 시위대는 또 다를 거고. 경찰 중에도 시위대를 진압해서 의기양양한 사람도 있고,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 거고. 그게 서사성인 거예요. 똑같은 걸 보고도 자기의 고유성에 따라 다르게 읽고 말하는 거죠. 같은 현장이지만 다 다른 거예요. 무엇을 참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서사성이라는 거예요. 객관적 사실이라는 게 있는 거고, 서사적 진실이라는 것도 있는 거죠.

그런데 이 과정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는데요. 이게 이명박 전 대통령 회고록에 나오는 자기 얘기인데요.

“특히 중점을 둔 것은 G20에 포함되지 못한 개도국들이 느낄 소외감을 해소하고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도록 배려하는 일이었다. G20이 배타적 정상회의라는 비판을 일소하고 외연을 넒혀 명실 공히 전 세계를 대표하는 국제 공제체제로 발전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이게 회고록에 나오는 얘긴데요. 모르겠습니다만, 당시 저런 의도로 저런 노력을 했다는 언론보도는 못 봤어요. G20라는 조직은 이미 공고화된 거대 공룡이에요. 근데 자기가 무슨 수로 그걸 뒤집는다는 거예요. 백 번 양보해도 그건 자기 바람이에요. 신화는 이렇게 탄생하는 거예요. 저 의지는 전 허구라고 봐요. 신화는 완전히 거짓말이 아니에요. 사실과 허구가 적절하게 믹스 되어서 사람들이 ‘그럴 수도 있겠구나’할 때 신화가 만들어지는 거죠. 허황된 거짓말은 신화가 아니에요. 그것은 그냥 꿈속 얘기인 거죠.

우리가 주의할 점이 마을을 기록할 때 이런 신화를 만들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과정에서 뭔가 덧씌워지고 조작되면, 진실성은 점점 떨어지고, 결과적으로 교훈도 떨어지는 거예요. 객관적 사실은 계속 추구 되어야 하는 가치라는 거죠. 구술은 어차피 객관적일 수 없다고 포기하란 말이 아니에요. 계속 추구해야 하는 거죠. 스토리텔링, 창의성 좋지만 진실을 향한 추구는 꼭 있어야 한다는 걸 강조해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구술 인터뷰 방법

사본 -77

구술 인터뷰의 3단계

구술은 세 단계로 나눠서 생각을 하시면 돼요. 인터뷰하시기 전에 준비하는 단계, 인터뷰 진행하는 단계, 마치고 잘 정리하는 단계. 그런데 제가 이 세 단계 모두가 기록을 만드는 단계라고 했어요. 문서 자료가 있다고 하면, 문서 자료 하나가 만들어지는 단계고요. 문서가 만들어지면 그것은 행위의 결과기도 하고 이유기도 하거든요. 문서에 근거해서 사람들이 일을 하잖아요. 기록을 ‘행위의 결과’로 착각하는데 ‘행위의 이유’이기도 해요. 구술도 마찬가지에요. 경험을 이야기하신 거니까 결과라고 생각하겠지만, 이것을 통해서 다른 걸 읽고 뭘 만들어나가기도 할 것이기 때문에 이유가 되기도 해요.

 

준비, 기록, 마무리 하는 각 단계에서 강조해야 할 것들이 있어요. 준비하는 단계에서는 질문이 제일 중요합니다. 이 분에게 무엇을 물어볼 건지 핵심을 잡는 것이 제일 중요해요. 그것은 나의 준비고요. 말씀하시는 분이 네가 그런 걸 듣고 싶어 해도 ‘내가 다 말 못해. 그런 건 내가 몰라. 말하면 다쳐’ 이럴 수 있어요. 억지로 끌어낼 수 없거든요. 제가 100을 준비했으면 80만 말씀해 주실 수 있어요. 또 다른 경우에는 80 얘기하고 20 벌는데 새로운 30을 더 이야기해 줄 수 있어요. 나는 ‘이런 것도 잘하는데 그건 왜 안 물어봐’할 수 있어요. 그런데 내가 아무 준비를 안 하면 말씀을 끌어낼 수 없는 거죠. 내가 그 분과 교감을 형성하고 ‘라포’라는 표현을 쓰는데 공감대를 형성하려면 준비해야 하는 거죠.

이것은 갑자기 생각난 건데, 어르신들을 많이 만나거든요. 사전 질문지를 만들어서 보내죠. 그러면 나에 대해서 꼼꼼히 조사했구나. 네가 이 정도 준비했으면 할까 말까 고민했는데 해야겠어. 이런 재미에 하는 거죠. 만나기도 전에 나를 좋게 봐주는 구나. 그러면 이야기가 잘 돼요. 마지못해 하는 분들은 말도 짧고 하고 싶어 하지 않기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죠.

인상 깊은 분 중에 한 분은 ‘OOO’이라는 어른이 있는데요. 4.19때 혼자서 참여했던 당시 대학생이에요. 나중에는 YS 쪽에서 활동도 하신 분인데. 개인적으로는 정말 순박하더라고요. 느꼈어요. 이야기도 너무 신나게 하고 20시간 넘게 했어요. 2-3시간 씩 7-8번 만났으니까 친해졌죠. 끝나면 막걸리 한 잔씩 하고. 얼마 전에 쓰러지셨다고 하더라고요. 가까워진 이유가 4.19 흔적 중 어떤 대목을 자기는 입증하고 싶은데 평생을 찾은 거예요. 동아일보에도 몇 번을 마이크로필름을 찾아보고 했는데 못 찾았대요. 그게 그건지 모르고 그 분 조사하는 과정에서 신문 한 카피 해놓고 질문에 반영을 했던 거죠. 이거 어디서 찾았냐고 물어보면서 좋아하는 거죠. 그래서 많이 가까워졌고 면담도 길어졌죠.

여러분들도 누구를 인터뷰하든지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 가능하면 사전에 교감을 좀 하는 것. 당신 혹은 선생님이 하고 싶은 말씀을 최대한 하세요. 내가 우선 듣고 싶은 건 이거다. 다른 거 더 이야기해 주셔도 된다. 불편하신 건 안 하셔도 된다. 하려면 알맹이가 있어야 해요.

그 다음에 진행할 때는 상대방을 배려하는 게 좋죠. 너무 장시간을 한다든지 자세가 너무 뻣뻣하다든지 내가 물으러 간 사람인데 말하려면 하고, 말라면 말고 그러지 말고 겸손하고 예의 있는 자세라든지. 그 다음에 중요한 건 음성이든 영상이든 현장 상황을 남기는 게 중요합니다. 요즘은 기자재가 발달해서 기계가 너무 많아요. 되도록이면 영상으로 남기는 게 좋다는 생각이고요.

마지막 마무리할 때는 ‘녹취문’이라고 생각을 해요. 말한 것을 전부다 쓸 수는 없죠. 전부다 쓰기도 해요. 그것은 너무나 힘든 작업이고 문맥이 흘러가도록 텍스트화 문자화 해 놓는 건 중요하죠. 왜냐하면 음성이나 모션 검색은 안 되지만 텍스트는 검색이 되잖아요. 이 중에 ‘청년 허브라’는 단어가 나온 데를 찾아가고 싶은데 문자가 없으면 방법이 없는 거예요. 6-7시간을 여기저기 눌러가면서 찾아야죠. 문자화 해 놓으면 빠른 시간 안에 정보에 접근할 수 있죠. 그래서 저는 질문을 성의껏 작성하는 것, 진행 과정에서 예의 있게 하면서, 현장을 영상으로 남기고, 녹취문을 남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물론 저작권 문제라든지 여러 가지 서식과 서류들도 필요해요. 동의서라든지 등등. 그런 것들은 나중에 더 구체적인 소통이 생긴다면 그 때 이야기하기로 하고요. 상징적으로 중요한 것 이거라고 봅니다.

엄마 인터뷰

몇 년 구술 작업 하면서 어머니를 인터뷰하기로 마음을 먹었어요. 아버지는 전혀 관심이 없는데 어머니는 적극적이셔서 했어요. 몇 번 했어요. 네 번 했는데 10시간 넘게 했어요. 왜 엄마를 했냐 하면 그거는 대게 단순한 이유였어요.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다니다 보니까 , 우리 엄마 이야기를 남길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사실은 저는 제가 어머니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하면 충분히 서로 교감이 되어 있으니, 좋은 내용을 끄집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보니까 내가 모르는 게 너무 많더라고요. 사실관계로 하자면, 우리 엄마가 도덕적인 걸 강조해서 (비도덕적인 건 아니지만) 남녀 관계에 대해 말씀 많이 하셨는데 엄마도 다 있었더라고요. 우리 형과 나를 보는 엄마의 생각도 내가 알던 것과 다르더라고요. 그리고 제가 형과 아버지를 바라봤을 때 부정적으로 봤던 형과 아버지의 측면이 엄마를 통해서 긍정적으로 바뀌었죠. 엄마가 대변한 것이 아니라 엄마 생각만 이야기했어요. 형과 아버지는 이 작업에 참여 안했으니까 그 사람들은 아직도 그대로야. 그런데 어미와 저는 보는 눈도, 대하는 방식도 바뀌었어요. 그 바뀜으로 인해서 아버지와 형이 뭐가 바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어머니와 나는 바뀌었어요. 나는 묻는 입장이었지만 내가 묻는 방식을 통해서 엄마도 새롭게 알게 된 게 있대요.

가족구성원은 좀 특별하지만 사회적 관계로 적용하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가족 구술은 관계를 재형성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을 해요. 어느 집도 이런 걸 했어요. 그런데 그 집은 아버지가 하셨어요. 주말마다 참 열심히 했어요. 주말마다 2시간 씩 하는 거예요. 어머니가 왔다 갔다 하실 거 아니에요. 그러면 엄마가 “거짓말 하고 있네” 하다가 싸워서 인터뷰가 중단됐어요. 다시 되길 바랍니다. 그런 진통도 괜찮아요. 그런 진통도 조금씩 관계가 복원될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어머니를 인터뷰하면서 영상으로 찍어놨는데요. 저희 어머니가 한국 전쟁 경험을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에요. 원래 평안북도 정주에서 나셔서 전쟁 과정에서 피난을 오셨어요. 1.4후퇴 때 언 강을 넘어 왔대요. 집집마다 피난 보따리라고 이불, 밥솥을 이고 지고 가죠. 소는 큰 재산이었죠. 요즘 자동차 이상이죠. 그런데 얼음이 깨져서 소가 빠지는데도 소는 ‘음메, 음메’ 하는데도 폭격이 오니까 그냥 갈 수밖에 없는 거예요. 아이 업은 엄마가 포탄에 맞아서 돌아가셨는데 애는 거기 업혀서 울고 있는데 사람이 저걸 ‘어떡해, 어떡해’ 하면서도 가는 거예요. 그게 전쟁이다. 그런 게 또 있어야겠냐. 무슨 이유라도 전쟁이 있으면 안 되는 거다. 그런 몇 가지 사례와 말씀이 제가 읽었던 어떤 반전의 메세지와 텍스트보다 강렬했어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다른 분들에게도 전달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국민학교 다니실 때 이야기도 잠깐 해요. 교탁이 책상이 어떻게 생겼고, 교실 청소는 어떻게 했는지. 요즘과 비슷한 것도 다른 것도 있어요. 저 나이 때 국민학교를 다니신 어른들의 기억 역시 다 다를 거예요. 그 이야기만 모아도 50년대 국민학교가 새로운 컨텐츠로 만들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고요. 전쟁통에 어머니의 2살 터울 동생이 설탕물이 그렇게 귀하다고 너무 먹여서 죽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죽은 거예요. 나한테는 외삼촌이죠. 아주 어린 나이에. 그때 그 아이의 엄마. 우리 엄마의 엄마가 대놓고 울지를 못하셨대요. 시어머니가 있어서. 그런 관계. 그게 일반적이지는 않을지라도. 자기 자식이 죽었는데 목 놓아 울지도 못하는 고부관계는 무엇일까? 할머니는 자책이 심했고. 이 집에서는 첫아들이었던 거죠. 결국에 피난통에 아이가 숨진 지역에서 이사를 갔을 거 아니에요. 가보니까 조그만 텐트처럼 가묘 같은 걸 해 놨더라고 할머니들이 우셨더라고. 그런 기억. 요즘에는 생각할 수 없는 상황들이 이야기되는 것을 보면서 이런 이야기들도 좀 들으면 예전에는 어떻게들 사셨구나 하는 것을 접근이랄까 상상이 가능하겠다. 50-60년대 전쟁이 있었지 혼란스러웠겠다, 가난했더라는 문자로 느끼는 이야기 말고 피부로 느끼는 자료가 되겠구나 싶었어요.

우리 엄마는 특별한 직업이 없고 결혼 이후 전업주부로 살아오신 분인데 이런 분 이야기가 충분한 자료가 되더라고요. 어른들이 그런 이야기하잖아요. 내가 살아온 이야기 적으면 책 한 권이 되잖아요. 누구든 그럴 수 있다. 틀린 말이 아니에요.

정리해서 말씀드리면, 우리나라가 최근에 공공 영역에서는 기록을 관리하는 것을 제도화해서 잘 하고 있다. 다만 민간 영역 마을, 일상에서 만들어지고 나가야 될 기록은 제대로 되고 있지 않다. 그건 누가 대신 해주지도 못한다. 우리가 남기면, 당장 우리는 그걸로 효과를 못 볼지라도 불과 얼마만 지나면 후대들에게 좋은 자료, 살아있는 자료를 전해줄 수 있을 거라는 강한 믿음을 갖고 있고요. 그래서 구술 기록을 남기자. 구술 기록은 몇 가지 포인트만 놓치지 않으면, 누구나 말할 수 있고, 만들 수 있고, 나눌 수 있는 자료다. 그래서 구술을 각개에서 활성화하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긴 시간 혼자서 막 떠들었는데 질문이나 조언해 주실 분 있으면 이야기 나누면 좋겠습니다.

[질의응답]

Q. 어제도 어머니랑 같이 얘기하다 와서 저 사례가 와 닿아서요. 일상적으로 대화는 되는데 구술 작업까지 가는 설득을 어떻게 했는지 궁금하고. 시간 설계도 궁금했어요.
A. 제 경우에는 제 일을 얘기를 하는 편이니까, 직접적으로 제 일을 하다 보니 남들 얘기만 들으니 그렇다고, 가족 얘기 듣고 싶다고 했고요. 그리고 나만이라도 엄마 어떻게 살았는지 알고 있자. 우리 애들한테 할머니 어떠셨는지 얘기할 수 있으면 좋지 않냐. 그렇게 얘기했고요. 대체로 어르신들이 말씀하시는 걸 좋아하세요. 그런데 어떻게 찍을 건가를 고민하셔야 할 거 같은데. 영상을 남기면 좋은데. 스마트폰을 거치대 놓고 잘 찍으면 되고요. 찍을 때 말씀하시는 분만 잡아도 되고. 찍는 건 편집 없이 쭉 가시면 되거든요. 예쁜 영상을 찍는 게 아니잖아요. 방송에 나가는 것도 아니고, 약간 거칠더라도 쭉 찍으시면 될 거 같아요.  다만 말씀은 예전에는 2시간 권장했는데요. 50분 하고 10분 쉬고. 한 세 시간들은 웬만한 분들은 괜찮으시더라고요. 오히려 2시간 하면 흥이 나다 끊기더라고요. 저는 3시간을 권장해요. 한 번 할 때. 건강을 자신하는 남자 어르신들이 5시간, 6시간 하기도 했는데 다음엔 안되겠다. 하더라고요. 6시간 하신 분은 정말 큰 일 나는 줄 알았어요. 낯빛이 달라지더라고요.

Q. 3시간씩 하면 총 몇 회 정도 하게 되나요?
A. 사람마다 다 달라서. 평균 5-6시간은 말씀하실 게 다 있는 거 같아요. 질문에 따라 다른 거 같아요. 우리끼리 인터뷰를 한다고 하면, ‘너 고등학교 때 어땠어?’ 할 말이 없잖아요. ‘고등학교 때 젤 친한 친구가 누구야?’. ‘고등학교 때 맞아봤어?’ 이런 질문은 할 말이 많아지죠.

Q. 질문을 준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세 시간 동안 듣고 정리하는 입장이잖아요. 듣는 사람이 텍스트에만 집중하면 안 되잖아요.
A. 제가 그래서 거금을 드려서 패드를 샀어요. 종이로 할 때는 질문지를 계속 봐야 하잖아요. 패드는 세워놓고 넘기면 되잖아요. 인터뷰 듣는 동안 타이핑은 금물이에요. 정서상 어른들은 타이핑은 딴 짓이고, 손으로 쓰는 건 쓰는 거예요. 손으로 메모는 괜찮아요. 그리고 제가 1시간 넘게 얘기했는데 거의 소통이 됐죠. 그런데 나중에 들으면 안 들리는 단어가 있어요. 맥락을 가지고 사람 이야기를 듣지, 단어 하나하나를 듣지는 않잖아요. 그런데 듣다 보면 생소한 단어가 있어요. 그런 것들은 여쭤봐야 돼요. 최대한 인터뷰하는 사람은 젤 알아듣게 현장에서 물어봐둬야 해요. 저는 제가 인터뷰한 영상을 다 녹취를 할 수 없어서, 다른 분들이 하시면 제가 검독을 하는데요. 제가 한 말이 안 들릴 때도 있어요.

Q. 질문 두 가지. 비언어 소통은 어떻게 문자로 기록하는지. 면담하면서 생기는 관계가 있잖아요. 듣다 보면 정보와 권력이 생겨서 책임감도 생기는데요. 이후에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은 사례가 있을지 궁금했어요.
A. 비언어 소통은 녹취문에서는 지문으로 합니다. 녹취문을 작성할 때 규칙을 자기 나름대로 정해야 해요. 여러 명이 할 때는 함께 정하고, 혼자 할 때는 혼자 정하고. 웃을 때도 (웃음) 할지. 웃음도 여러 종류가 있으니 몇 가지로 통일해서 적어놓고요. (미소를 지으며)(박수를 치며 웃음) 이런 식으로요. 두 번째 말씀하신 거는 그거가 어려워요. 성향도 좀 있는데요. 저는 사람 사귀는 걸 좋아하고 정이 많아서 그런지 밟히는 어르신들이 많아요. 그래도 면담 후에는 찾아뵙기가 어려워요. 그래서 오히려 그런 미련을 버리라고 하죠. 그러면 자꾸 그 말에 의지하고 싶어지죠. 그래도 몇 분은 계속 밟히고 그러죠. 마을에서는 전혀 다를 거 같아요. 목적이나 의도가 다르니까. 무의탁 독거노인 분들과 인터뷰할 때. 2015년에 혼자 사시는 어르신들의 기록을 남기기 위해 구술을 한다. 이건 마을활동은 아니잖아요. 그거에 대해서는 제가 뭐라 말하기 어려운 거 같아요. 학계에서 하는 것과는 다를 거 같아요.

Q. 매뉴얼이 있으신지 궁금하고요. 저희의 경우는 대상을 잡아야 하거든요. 대상을 어떻게 지정하는지 궁금해요.
A. 인터뷰 과정에서는 면담자 얘기를 안 하는 게 원칙입니다. 인터뷰하기로 결정하기까지는 내 소개를 많이 해야죠. 하지만 인터뷰를 하는 동안에는 구술자 중심의 자료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최대한 그 분 중심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구술사가 선정되는 최종 단계는 저의 의지가 아니고 구술자의 의지거든요. 잠재적 구술자 폭을 설정한 다음에 한 분 한 분 만나가는 과정인 거죠. 예를 들면 성산2동 할머니 중에 70대 이상을 인터뷰하겠다. 하면 운이 좋으면 복지사 등과 연결돼서 명단을 받을 수도 있고요. 그 잠재적 범위 안에서 만나가면서 맺어지는 거죠. 계속 폭을 좁혀나가는 거죠.

Q. 영상 사용하면 의식하시는 분들은 어떻게 하는지?
A. 그것도 사람마다 다르신데. 너무 심하면 영상을 안 찍는 것도 방법이에요. 다만 음성 정도라도 남기는 게 좋더라. 그 외는 충분히 이야기를 하는 수밖에 없죠.

Q. 인터뷰 하고 나서 활용 같은 부분이 있잖아요. 활용 시에 구술자가 싫어하거나 거부할 수 있잖아요. 동의는 언제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요?
A . 이야기 해주시는 분에 대한 예우가 서양이랑 우리랑 조금 달라요. 서양에서는 기록을 해주면 고마워하는 편이에요. 우리는 구술자에 대해서 사례를 해요. 유교적 관습이랄까. 사례를 하는 경우가 많아요. 하다 못 해 과자라도 사가고요. 구술비를 책정하기도 하고요. 구술 기록은 구술자 거예요. 그게 기본에요. 공공기관에서는 기증받는 개념으로 해요. 구술동의 싸인, 저작권을 넘기는 싸인, 컨텐츠 활용동의서 싸인. 세 가지를 받아요. 어르신들 인터뷰의 가장 큰 변수가 구술자의 변심이에요. 다 하고 나서 삭제하라, 지워라, 공개하지 마라. 이런 경우 엄청 많아요. 일반인 인터뷰 할 때는 구술 동의서, 활용 동의서를 받습니다. 활용 동의서에는 상업적 용도로 사용 안 하겠다 또는 상업적 용도 활용 시 재협의 드린다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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